유리창 너머로 흐려진 이름
비가 오는 날엔 괜히 라디오를 켜게 된다. 우산 아래로 스며드는 비 냄새, 도로를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 그리고 먼 옛날 들었던 음악 한 곡이 문득 나를 데려간다. ‘유리창엔 비, 비에 젖은 너의 얼굴이…’ 그 노래가 흐르면 나는 자꾸만 그 시절로 돌아가게 된다. 창문에 뿌옇게 맺히던 김처럼 선명하지 않아 더 그리운, 그런 시간.
고등학교 2학년, 교실 창가 맨 뒷자리. 나의 자리였다. 창문 바깥으로는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가끔은 그 나무 사이로 누군가가 서성이던 모습을 본 기억이 있다. 그것이 누구였는지는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계절의 공기와 햇살, 그리고 마음속의 떨림은 지금도 선명하다.
아마도 첫사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출처: 유튜브 SS-REDE>
그 애는 유난히 말을 아꼈고, 웃음도 조용한 아이였다. 그런데 그런 조용함이, 그 시절엔 마치 어떤 비밀처럼 느껴져서 자꾸만 궁금해졌다. 종종 같은 버스를 타고 하교하던 그 길. 창밖으로 비가 오는 날이면, 유리창에 그 애의 얼굴이 흐릿하게 비치곤 했다. 말을 걸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냥 창밖만 바라보며 함께 시간을 흘려보냈던 날들.
어떤 날은, 우리가 말없이 나란히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이 꼭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다.
말이 없어도, 무언가 따뜻한 공감이 흐르던 그 시간.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고도 풋풋한 착각이었겠지만, 그 착각이 참 오래도록 나를 붙잡았다.
한 번은 그 애가 먼저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저 느티나무. 여름마다 매미가 울잖아. 난 그 소리가 좋더라.” 그게 처음 들은 그 애의 진심 같아서, 나는 한동안 매미 소리가 울릴 때마다 그 말을 떠올렸다.
졸업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함께했던 봄소풍날, 우연히 같은 조가 되어 같은 피크닉 매트를 나눠 앉았다. 들꽃향이 나던 풀밭에서 우리는 그제야 조금은 가까워졌고, 서로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러나 그건 끝을 앞두고서야 찾아온 용기였다.
그 봄이 지나고, 우리는 서로 연락처도 제대로 교환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종종 그 시절을 떠올린다. 그 애의 얼굴은 점점 흐릿해졌지만, 유리창에 맺힌 빗물 너머로 보이던 그 눈빛은 이상하게도 기억난다.
가끔은 SNS로라도 찾아볼까 했지만, 이름 석 자조차 너무 흔해서 곧 포기하게 된다. 어쩌면 지금도 어딘가에서 비 오는 날 유리창을 바라보며 그때를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창문 밖에도 비가 내린다. 여전히 유리창엔 비가 흐르고, 그 위에 기억이 흘러내린다. 아주 천천히, 아주 조용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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